빨래를 널다

꽉 찬 30년치 빨래더미

2026. 2. 1.

나는 빨래 더미.

빨래를 널어.

빨래가 또 생겨.

0.

30년을 살았다. 정리하고 싶은 충동이 있다. 시작, 위기, 깨달음, 회복. 그런 이야기.

근데 그렇게 억지로 접어 포개다 보면 꼭 무언가가 빠진다. 주름 사이에 끼어 보이지 않게 된 진실들. 그래서 그냥 널기로 했다.

1.

대학원을 자퇴할 때 교수님께 메일을 썼다.

“가치관을 정립하지 않은 채 흘러가는 대로 그저 주어진 것에 대해서만 노력하며 살았던 삶의 방식의 연장선이었습니다”.

2.

회사에 갔다.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를 보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나”에 갇혔다. 내 기술, 내 기초, 내 성장. 모양만 바뀌었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 기본기를 익혔다. 신뢰를 받고 신뢰를 줬다. 친구도 만들고, 동료도 생겼다.

3.

작년에 글을 처음으로 올렸다.

불완전해도 일단 드러낼 것. 연결될 것.

드러내니까 도움을 받았다. 물어보니까 답이 왔다. 연결되니까 멀리 갔다.

4.

퇴사하면서 선배님께 커피챗을 요청했다. 동문회에서 10년, 20년 선배들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라면 안 했을 일들이다.

다른 삶을 듣는 게 좋아졌다. 영화 한 편처럼. 나와 다른 원점에서 시작한 사람들. 다른 선택, 다른 후회, 다른 기쁨. 들려줘서 감사했다.

듣다 보면 내 삶도 다르게 보인다.

5.

장자가 다리 위에서 물고기를 봤다. “즐겁겠다.” 친구가 물었다. “네가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알아?”

“나는 이 다리 위에서 알았어.”

내가 보는 건 한 단면이다. 그럼 다른 쪽에선 뭐가 보일까.

6.

4년이 지났다. 돌고 돌아 다시 출발점.

근데 같은 자리는 아니다. 나선. 같은 방향인데 한 바퀴 돌았다. 조금 더 넓게. 조금 더 깊게.

7.

모든 건 변한다. 근데 어떤 건 남는다.

천 년 전 사람이 쓴 글이 지금도 읽힌다. 좌표가 달라도 겹치는 구조가 있다.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유지되는 관계. 그게 불변량이다.

뭐가 남는지는 변해봐야 안다. 고정된 채로는 모른다.

8.

작년 하반기는 정신이 없었다. 회사의 위기, 이직, 그리고 외주까지. 외주는 꿀이라고 들었다. 꿀이 아니었다.

공짜 점심은 없었다. 책임의 무게. 계약의 무게. 대충 넘기지 못하는 성격. 좋을 때도 있고 괴로울 때도 있다.

앱, 웹, 백엔드. 내 범위 밖의 것들. 직접 해봐야 안다. 부딪혀야 남는다.

외주가 끝났다. 이직도 됐다. 근데 꽤 몸과 마음이 상했었다.

9.

흉은 센 살이다. 진물이 그 원료다.

10.

치앙마이에 갔다. 삶을 정리하고 오겠다고. 기승전결을 써오겠다고.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서.

시장에 갔다. 과일 가게 할머니와 얼굴을 텄다. 망고를 많이 먹었다.

길거리에서 따뜻한 콩물을 먹었다.

푸드트럭 청년한테 윙크를 받아 마지못해 호객당했다.

코인 빨래방에 2번 갔다. LG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었다. 서양인 할아버지께서 사용법을 알려주셨다.

숙소에 돌아오니 옆집 고양이가 들어와 있었다.

기승전결 없이도 하루가 찼다.

고양이

옆집 고양이는 아니고 다른 고양이

일요일 시장, 최고의 우연. 너무 좋아서 부끄러운 성격에 팁도 주고 인스타도 물어봤다 — @dr.kensaquarium

11.

빅터 우튼이 말했다. 첫 음을 잘못 잡아도 괜찮다고. 양 옆에 맞는 음이 있으니까. 리듬만 잃지 않으면 된다고.

12.

책을 두 권 가져갔었다. “문학의 기쁨”, “일하는 마음”. 둘 다 추천받은 것들.

“문학의 기쁨”은 굳어버린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웃겼다. 여전히 나도 그랬었다. 회고를 멋지게 써 이를 발판 삼아 다음 시합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여기서도 승패에 갇혀 있을 뻔했다.

13.

예전엔 막다른 길 같은 게 있었다. 여기서 실패하면 끝. 이걸 못하면 끝.

지금은 좀 다르게 보인다. 불안 옆에 뭔가가 있다. 실패 옆에 뭔가가 있다. 막혀도 옆으로 가면 된다.

원래 그랬다. 사방에 가능성이 있었다. 비어있기에 꽉 차 있었다. 꽉 쥔 손을 놓자.

14.

올해 목표

하루하루. 몸 챙기고, 마음 챙기고, 일하고, 책 읽고, 사람 만나고. 빨래를 널고.

빨래도 말라야 개킨다.